몽골-금 전쟁은 1211년부터 1234년까지의 몽골 제국과 금나라가 싸운 공방전이다. 칭기즈 칸의 침공: 1211년~1215년 금나라는 이전부터 피지배민족인 한족을 통치하기 위해 거란족, 몽골족 등 또 다른 유목민족을 제어하는 정책을 쓰곤 했는데, 이와 더불어 다른 유목민족을 차별하고 이간질시키고 주기적으로 몽골을 토벌시켜 남성들을 죽이는 정책을 써서 유목민족에게 악명이 높았다. 칭기즈 칸이 금나라를 아예 밀어버릴 작정을 한 이유가 바로 이런 정책으로 조상 암바가이 칸이 금 해릉양왕에게 처형된 원한 때문이였다. 1206년 몽골고원을 통일한 칭기즈 칸은 내부를 안정되게 한 후, 1211년 쿠릴타이에서 금나라와의 전쟁을 결정하고 몽골의 모든 병력(추정치 약 9만~12만 명)을 총동원하였다. 그리고 위에 나온 이유로 유목민족의 적이나 다름없던 금나라를 공격하였다. 1211년 가을, 몽골군은 금나라의 첫 방어선인 오사보에서 금나라군과 오사보 전투로 겨루었다. 수적으로는 금나라군이 훨씬 우세했으나, 제베가 우회해서 후방을 기습했고, 여러 요충지에 분산배치된 몽골군에게 각개격파를 당했다. 오사보를 뚫은 몽골군은 흩어져 있는 금나라군을 규합한 완안승유의 군대와 야호령 전투를 벌이는데 이번에도 무칼리의 별동군이 우회해서 금군의 후위를 위협하여 승리를 거둔 뒤. 이후 패잔병을 수습한 금나라군과 회화보 전투에서 싸워서 또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금나라는 성채전에 의지해야 될 정도로 불리해졌다. 이후 회하보 인근을 초토화시킨 몽골군은 이제 만리장성의 관문인 거용관 부근에 도착했다. 거용관은 알다시피 수도인 연경(베이징)에서 불과 50~60km 정도 떨어진 말 그대로 최후의 관문이기에 금나라에게 매우 중요한 최전방이었고,이를 아는 금나라군은 거용관 근처 100리에 마름쇠를 잔뜩 깔아놔서 몽골군이 침공 못하게 막아놨다. 하지만 이후 몽골군이 샛길로 우회해서 거용관을 뚫었고, 마침내 금의 수도 연경(베이징) 부근까지 도착했지만 금나라의 구원군이 도착한다는 소식을 듣고 퇴각하였다. 이후 칭기스칸은 자신의 아들인(주치,차가타이,오고타이)를 시켜서 대동(다퉁) 인근의 도시를 초토화시켰고, 인근의 목초지를 급습해서 군마를 모두 빼앗았다.이로 인하여 금나라는 보병 위주로 군사를 운영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금나라는 요동에도 목초지가 있기에 만약 요동 일대의 거란족과 사이가 좋았다면, 기병을 어느 정도 양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했듯이 금나라는 요동이나 화북지역의 유목민족에게 악명이 높았고, 여기에다 거란족이 몽골과 손을 잡는다는 소식을 들은 금 위소왕이 거란족의 부족장을 죽이고, 일반 백성을 강제 이주 시키는 등 탄압 정책을 시행하였기에 요나라 왕족의 후손인 야율유가를 필두로 거란족이 반란을 일으켜서 요나라를 다시 세우는 바람에 실패하였다. 물론 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금나라는 60만 대군을 일으켜서 진압하려고 했지만, 당시 보병 위주인 금나라군은 몽골 기병의 지원을 받은 야율유가 부대에게 참패하였다. 한편 휴식을 취한 몽골군은 1212년 다시 금나라를 두 갈래로 나눠서 침공했는데, 징기스칸의 본부대는 대동을 포위하고 구원하러온 금나라군을 격파했고, 제베의 부대는 요양(랴오양)을 함락시켰다. 하지만 대동을 포위하는 도중에 칭기즈 칸이 화살을 맞아서 부상을 입었고, 다시 변경으로 후퇴하였다. 이후 1213년 7월, 몽골군은 금나라를 굴복시키기 위해 재침공하였고, 이전에 한번 뚫려서 철벽방어를 한 거용관을 피해서 다른 관문인 자형관을 뚫은 뒤에 수도에서 온 구원군을 격파했고, 이후 별동대를 보내 후방에서 거용관을 공격해서 다시 점령하였다. 그리고 이후 금나라의 수도인 연경을 포위했고, 이와 동시에 몽골군은 병력의 일부를 남긴 채로, 단 11개의 성을 제외한 모든 화북지역의 성들을 초토화시켰다. 한편 연경 포위가 1214년까지 계속되자 위소왕 이후에 즉위한 금 선종은 막대한 세폐와 자신의 딸과 부인을 보내는 조건으로 강화를 체결하였고, 몽골군은 이에 응하고 철수하였다. 급한 불을 끈 선종은 1214년 6월 수도를 연경에서 방어에 용이한 남쪽의 개봉으로 옮겨 몽골의 남침에 대비하고 연경에는 황태자와 수비군 일부를 남겨 지키게 했다. 하지만 이에 자극받은 징기스칸은 연경을 포위했고, 무칼리에게 대정 부근의 요하 일대를 공략하게 하였다. 1215년 무칼리는 20만 정도의 금나라군을 격파하고 대정을 점령하였고, 이후에도 요하 지역을 초토화시켰다. 이전에 거란족의 반란을 진압하러 간 포선만노는 대진국을 세웠고, 이후 몽골을 피해 동쪽으로 가서 동하를 세웠다. 그리고 징기스칸은 이때, 연경을 함락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한편 동요를 세운 야율유가는 몽골에게 정식으로 복속을 선언하였지만, 자신만의 독립적인 나라를 세우길 원한 일부 거란족들은 이에 불만을 갖고 야율유가를 축출하였고, 나머지는 남쪽으로 내려가서 후요를 세웠으며 고려를 침공한다. 무칼리의 침공: 1216년~1229년 칭기즈 칸은 1216년에 서요, 1219년에 호라즘 왕국을 침공하였고, 이에 따라 몽골의 주력군은 서방 전역으로 차출되었다. 중국 방면에는 무칼리가 이끄는 소규모 몽골군만이 남았는데, 약 2만 명의 몽골인과 4만~7만 명의 타민족 군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무칼리는 축소된 군대를 이끌고도 1217년~1218년에 산동(산둥성) 일대와 대정 일대를 점령하였으며, 후요를 진압하기 위해 동하와 고려와 연대해서 궤멸시켰다., 그리고 1223년까지 개봉 부근을 제외한 나머지 곡창지역을 정복했다. 한편 이때의 금나라는 30여 년간 휴전상태에 있던 남송을 침공하여 국력을 회복하려고 하였으나, 1217년부터 1224년 사이에 걸쳐진 대송 전쟁이 별다른 소득이 없이 국력만 낭비하였고, 오히려 남송의 금에 대한 적개심만 키우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 전쟁으로 그동안 남송에서 매년 바치던 막대한 세폐가 끊기면서 역으로 경제적 손실이 가중되었다. 또한 서하도 금을 공격하게 되었다. 위소왕 시절 서하가 지원을 요청하나 이를 무시하였기 때문이다. 오고타이 칸의 침공: 1229년~1232년 1227년 칭기즈 칸이 죽고 2년 뒤 오고타이 칸이 뒤를 이었다. 오고타이 칸은 먼저 금나라에 화평 사절을 보냈으나, 금은 몽골 사절을 죽이는 것으로 답하였다. 그러자 격노한 오고타이 칸은 금을 침공하기로 결정한다. 당시 황하 북부의 대부분은 이미 몽골에게 넘어가 있었고, 금나라의 영역은 서쪽의 시안에서 황하를 따라 동쪽으로 가면서 황하 남쪽의 낙양과 개봉을 지나 황해에 이르는 길고 넓은 띠 모양으로 축소되어 있었다. 황하 연안, 특히 수도인 개봉 근처의 금나라 영토는 강과 수로, 요새들이 겹겹히 있어서 몽골군의 장기인 기병이 마음대로 활동하기 힘들었으며, 금나라의 남쪽 국경은 상대적으로 기병이 활동하기 수월했지만 몽골이 그쪽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먼저 남송을 통과해야만 했다. 이에 따라 당시 몽골이 금나라를 공격할 통로는 크게 두 곳이 있었다. 첫째는 화북의 몽골 영토에서 황하의 중류나 하류를 도하한 뒤 그물 같은 수로망을 피해 금의 수도인 개봉을 공격하는 길이었고, 둘째는 아예 서쪽으로 움직여 장안을 지나 동관을 돌파하여 동쪽으로 내려오는 길이었다. 이에 대비하여 금나라는 낙양에서 개봉까지 이르는 길에 20만 대군을 배치해 몽골군의 황하 도하를 막는 동시에, 동관에도 군사를 두어 서쪽으로부터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당시 금나라의 국력은 완전히 기울어 있었지만, 완안진화상이라는 명장이 등장하였고, 역시 금나라 최후의 명장 중 하나인 완안합달이 버티고 있었으며, 시대를 잘못 타고났지만 명군의 자질이 있었던 금 애종이 국가의 역량을 최대한 집결시켜 몽골제국의 공세를 막아내기 위해 노력했다. 몽골군의 본격적인 침공은 1230년부터 시작되었다. 오고타이 칸은 먼저 장안에서 시작하는 두 번째 루트를 선택하였는데, 이를 위해 몽골의 명장 수부타이에게 동관을 공략하라고 명령하였다. 당시 금나라의 장수 완안진화상은 군중의 일을 처리하다가 월권 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18개월 동안 갇혀 있었는데, 본래는 사형죄였으나 금애종은 완안진화상을 석방하여 몽골군과 싸우는 선봉으로 내세웠다. 그리고 완안진화상은 대창원에서 400명의 병사를 이끌고 20배에 달하는 8,000여 명의 세계 최강 몽골군을 격파하였다. 대창원 전투의 승리는 몽골군이 1221년 파르완 전투에서 잘랄 웃 딘에게 패배한 이후 처음 겪는 완패이었는데, 파르완 전투는 6만에 가까운 병력이 소수인 몽골군을 격파한 전투였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월등한 다수의 몽골군이 더 적은 수의 적에게 패배한 최초의 전투라고 할 수 있다. 이 전투의 결과로 완안진화상은 정원대장군 직을 받게 되었다. 이때 완안진화상이 이끈 부대가 충효군(忠孝軍)이다. 충효군은 금나라 말기 정예부대로, 몽골의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한 나이만, 강족, 위구르 족, 그 외 거란, 여진 등까지 섞인 다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기본적으로 말을 탈 줄 아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기병전력이 부족한 말기 금나라에 있어서 아주 강력한 전력이었다. 충효군은 비록 전투력이 강해도 성질이 거칠고 사나워 제어하기 어려운 부대였는데, 완안진화상은 부대의 규율을 바로잡고 민간인을 함부로 약탈하는 것도 막았다. 다음해인 1231년 몽골군은 서쪽과 동쪽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공세를 시작하였다. 먼저 서쪽에서는 경양을 포위하고 그 전년도처럼 대창원을 거쳐 동관으로 진입하려 하였다. 동쪽에서는 이와 조금 차이를 두고 한인 출신 장군인 사천택이 이끄는 몽골군이 남하하여 황하 북쪽에 아직 남아있던 금나라 영토인 위주(衛州)를 공격하였다. 위주는 금의 수도인 개봉의 바로 북쪽에 있어서, 위주를 빼앗긴다면 비록 황하라는 천연 장애물이 남아 있다고 해도 수도 방어에 상당한 압박을 받게 될 수 있었다. 이러한 몽골군의 양동 공격에 대응하여 금나라는 대장군 이랄포아(移刺蒲阿)이 지휘하는 일군을 서쪽으로 보내 경양을 구원하는 한편, 완안합달과 완안진화상이 이끄는 10만 대군을 파견하여 위주를 돕게 하였다. 서쪽 방면의 금군은 또 다시 대창원에서 승리를 거두고 경양의 포위를 푸는데 성공하였고, 이후 이랄포아는 위주로 이동하여 완안합달의 군대에 합류하였다. 이랄포아가 합류한 동쪽 방면의 금군은 이러한 수적 우세에 힘입어 서전에서 몽골군을 격파할 수 있었다. 완안합달-이랄포아 연합군에게 패배한 몽골군은 북쪽으로 물러면서 일부의 군대를 금군의 배후로 은밀히 이동시켰는데, 이 몽골 별동대가 금군의 후방을 급습하는 동시에 후퇴하던 몽골군이 역습을 가해오면서 금군은 크게 패하였고 위주를 몽골에게 내주었다. 한편 다시 서쪽 전선에서는 이랄포아가 위주를 구원하러 이동한 뒤 몽골군이 다시 대규모 공세를 퍼부어 대창원을 함락시켰고, 몽골군의 기세에 당황한 금군은 장안을 포기하고 그 지역의 모든 인구를 동쪽으로 피신시켰다. 금나라는 장안의 동쪽에 있는 동관을 아직 차지하고 있었지만, 이랄포아와 완안합달이 지휘하는 금군은 동관에 머무른채 소극적으로 나서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안안진화상이 지휘하는 1천 명의 병력은 동관을 공격한 몽골군을 격파하였다. 동관의 서부를 완전히 장악한 몽골군은 이곳에서 여름을 보낸 뒤, 툴루이의 제안에 따라 군대를 세 갈래로 나누어 금나라의 수도 개봉을 공격하였다. 당시 금나라의 국경을 보면 북쪽과 서쪽은 각각 황하와 험준한 산맥을 경계로 몽골을 접하고 있었고, 남쪽은 평야 지대를 두고 남송과 접하고 있었는데, 기병이 주력인 몽골군은 황하를 도하하거나 산악지대를 돌파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툴루이가 지휘하는 서군은 금군이 집결해 있는 동관을 크게 우회하며 남동쪽으로 원을 그리면서 한중을 돌파하여 남송의 영토를 통과한 뒤, 한수를 건너 남쪽으로부터 개봉을 급습하기로 하였다. 그동안 오고타이 칸이 이끄는 북군은 낙양과 개봉 사이의 몽골 영토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금나라의 군대의 관심이 서남쪽의 툴루이에게 쏠리는 사이 안전하게 황하를 도하할 기회를 엿보기로 하였다. 또한 일군의 몽골군은 동쪽에서 금나라를 위협하였다. 툴루이가 한수를 건너자 완안진화상은 동관의 수비병을 제외한 금나라의 마지막 정예병 20만을 이끌고 몽골군을 격파하려고 했다. 금나라군은 한수 건너에서 벌어진 몇 차례 전투에서 격렬하게 싸운 끝에 몽골군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지만, 몽골군의 기동력 때문에 잠시 시간을 늦췄을 뿐이다. 한수를 건너는 데 성공한 툴루이는 수적인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완안진화상을 견제하기 위한 일부 병력만 남기고 금나라군이 주둔한 곳을 우회해서 개봉으로 진격했다. 이를 알게 된 금나라군은 개봉을 향해 진군했지만, 몽골군이 인근 마을을 초토화시키고 기습전략을 펼쳐서 금나라군이 개봉까지 휴식없는 강제행군을 하게 만들었고, 이 가운데 거센 비와 폭설까지 내리는 바람에 금군은 굶주리고 서서히 지치기 시작하였다. 금군이 개봉에서 120km 정도 떨어진 균주성 근처의 삼봉산(三峰山)까지 도달했을 때 몽골군이 금군을 포위하였다. 몽골군은 의도적으로 균주 방향의 포위망을 일부 열어주었고, 많은 금군이 탈영하여 균주성 방향으로 흩어지자 몽골군은 이를 기습하였고, 결국 금나라의 남은 정예병은 궤멸되었고 명장 완안진화상도 몽골군에게 스스로 찾아가 죽기를 자처해서 죽음을 당했다.(삼봉산 전투) 마침내 균주성이 몽골군에게 함락되었고, 이때 동관에 있는 11만 병력도 개봉을 향해 가는 도중에 몽골군에게 궤멸되면서 이제 몽골군의 진격로엔 아무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황하 이북이 무주공산이 되자 이를 틈타 북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오고타이 칸은 황하가 얼어붙을 때를 기다려 친위대를 이끌고 안전하게 강을 건너와 남쪽으로 진군하여 툴루이와 합류하였다. 오고타이 칸의 합류로 몽골군의 군세는 5만명까지 불어났다. 그리고 마침내 몽골군은 개봉을 포위하기 시작하였다. 개봉 포위전과 금나라의 멸망: 1232년~1234년 개봉에 도착한 몽골군은 개봉성 주변의 참호를 모두 메꿔서 장애물을 없앴고, 마침내 개봉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이 당시 개봉은 원래 있는 인구에 피난민까지 합쳐져서 인구가 막대하게 불어났고, 양식이 떨어지는 속도는 이전보다 더 빨라졌다. 그럼에도 이에 맞선 금군은 진천뢰와 비화창 등의 화약무기를 사용해 몽골군에게 거세게 저항하였고, 이로 인해 전투가 장기화되어서 양측의 피해가 서로 커지자 수부타이는 금나라와 화의를 맺고 군대를 물린다. 몽골군은 비록 물러갔지만 이 당시 개봉에선 양식이 부족해지고 100만 명이나 되는 피난민을 먹일 식량이 없어지자 백성들은 굶어죽어가고 심지어는 식인을 하는 행위가 벌어지는 등 생지옥이 펼쳐졌다. 마침내 그동안 금나라에게 이를 갈던 남송이 몽골의 동맹 제의에 응해 명장 맹공을 필두로 한 3만 명의 군대와 30만 섬의 식량을 몽골군에게 제공하면서 전쟁은 금나라에게 완전히 불리해졌다. 결국 이런 불리한 조건을 극복하기 위해 애종은 개봉을 버리고 채주로 피신했다. 이에 수부타이가 이끄는 몽골군이 개봉성을 포위하고 황제마저 떠난 개봉은 더 이상의 저항력을 상실하고 결국 최립이라는 장수가 개봉성에서 반란을 일으켜 개봉은 결국 몽골군에 의해 함락되고 만다. 채주도 마찬가지로 몽골군의 위협에 노출되자, 무선이 남송의 사천 지역을 빼앗아 그 곳을 거점으로 재기하려 하였으나, 맹공의 선무공작으로 인해 전군이 복멸되고 무선은 도망치고 만다. 개봉을 함락한 몽골군은 채주까지 진격했고 때마침 맹공이 이끄는 남송군까지 합류해서 채주성을 포위하였다. 몽골과 남송은 채주성 근처의 연강과 시담호라는 두 개의 물줄기를 점령해서 채주 쪽으로 돌려서 채주는 수해와 굶주림으로 인해 생지옥이 되어갔다. 1234년 애종은 황족 완안승린에게 황위를 양위하고 몽골-남송 연합군이 채주 성문을 무너뜨리고 공격해 올 때 유란헌이라는 곳에서 목을 매어 자살하는 실로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결국 애종이 죽은 다음 날 채주는 함락되었고 완안승린은 도망치다가 황위를 물려받은 지 하루도 안 되어 몽골군에게 붙잡혀 처형당하고, 이로써 금나라는 1234년 멸망하고 말았다. 곽하마의 항전: 1236년 최후의 거점인 채주가 함락되었지만, 금나라의 부흥운동은 곳곳에서 일어났다. 이 중에 한명인 곽하마는 2년동안 최선을 다해 싸웠지만 몽골군에게 대패를 당했고, 아내와 자식을 죽이고, 곽하마 자신도 자결하였다. 결국 금나라는 최후의 명맥마저 끊어졌다. 결과 결국 몽골 제국은 자신의 숙적이였던 금나라를 완전히 멸망시킴으로써 원수를 갚음과 동시에 중원 정복의 발판을 마련하는데도 성공했고 그 이후 여진족을 상대로 대학살을 벌였다. 일부 여진족은 이를 피해 고려로 피난가서 하층민을 이루기도 했다. 그리고 남은 여진족과 금나라 지배 하에 있는 한족은 원나라의 하층민으로 편입되어 남인이 되었다. 사실 고려-몽골 전쟁과 몽골-남송 전쟁에 가려져서 그렇지, 금나라도 23년 정도로 꽤 많이 버텼다. 서하, 서요, 호라즘 제국, 조지아 왕국이 갈리던 이 때도 금나라는 끝까지 이를 악물고 버텼던 것이다. 초기에 기병의 상당수가 갈려나가고, 북중국 지역의 목초지마져 뺏기고도 저 정도 버틴 것만 해도 상당히 선전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몽골-금 전쟁은 1211년부터 1234년까지의 몽골 제국과 금나라가 싸운 공방전이다.


칭기즈 칸의 침공: 1211년~1215년

금나라는 이전부터 피지배민족인 한족을 통치하기 위해 거란족, 몽골족 등 또 다른 유목민족을 제어하는 정책을 쓰곤 했는데, 이와 더불어 다른 유목민족을 차별하고 이간질시키고 주기적으로 몽골을 토벌시켜 남성들을 죽이는 정책을 써서 유목민족에게 악명이 높았다. 칭기즈 칸이 금나라를 아예 밀어버릴 작정을 한 이유가 바로 이런 정책으로 조상 암바가이 칸이 금 해릉양왕에게 처형된 원한 때문이였다. 1206년 몽골고원을 통일한 칭기즈 칸은 내부를 안정되게 한 후, 1211년 쿠릴타이에서 금나라와의 전쟁을 결정하고 몽골의 모든 병력(추정치 약 9만~12만 명)을 총동원하였다. 그리고 위에 나온 이유로 유목민족의 적이나 다름없던 금나라를 공격하였다. 1211년 가을, 몽골군은 금나라의 첫 방어선인 오사보에서 금나라군과 오사보 전투로 겨루었다. 수적으로는 금나라군이 훨씬 우세했으나, 제베가 우회해서 후방을 기습했고, 여러 요충지에 분산배치된 몽골군에게 각개격파를 당했다. 오사보를 뚫은 몽골군은 흩어져 있는 금나라군을 규합한 완안승유의 군대와 야호령 전투를 벌이는데 이번에도 무칼리의 별동군이 우회해서 금군의 후위를 위협하여 승리를 거둔 뒤. 이후 패잔병을 수습한 금나라군과 회화보 전투에서 싸워서 또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금나라는 성채전에 의지해야 될 정도로 불리해졌다. 이후 회하보 인근을 초토화시킨 몽골군은 이제 만리장성의 관문인 거용관 부근에 도착했다. 거용관은 알다시피 수도인 연경(베이징)에서 불과 50~60km 정도 떨어진 말 그대로 최후의 관문이기에 금나라에게 매우 중요한 최전방이었고,이를 아는 금나라군은 거용관 근처 100리에 마름쇠를 잔뜩 깔아놔서 몽골군이 침공 못하게 막아놨다. 하지만 이후 몽골군이 샛길로 우회해서 거용관을 뚫었고, 마침내 금의 수도 연경(베이징) 부근까지 도착했지만 금나라의 구원군이 도착한다는 소식을 듣고 퇴각하였다. 이후 칭기스칸은 자신의 아들인(주치,차가타이,오고타이)를 시켜서 대동(다퉁) 인근의 도시를 초토화시켰고, 인근의 목초지를 급습해서 군마를 모두 빼앗았다.이로 인하여 금나라는 보병 위주로 군사를 운영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금나라는 요동에도 목초지가 있기에 만약 요동 일대의 거란족과 사이가 좋았다면, 기병을 어느 정도 양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했듯이 금나라는 요동이나 화북지역의 유목민족에게 악명이 높았고, 여기에다 거란족이 몽골과 손을 잡는다는 소식을 들은 금 위소왕이 거란족의 부족장을 죽이고, 일반 백성을 강제 이주 시키는 등 탄압 정책을 시행하였기에 요나라 왕족의 후손인 야율유가를 필두로 거란족이 반란을 일으켜서 요나라를 다시 세우는 바람에 실패하였다. 물론 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금나라는 60만 대군을 일으켜서 진압하려고 했지만, 당시 보병 위주인 금나라군은 몽골 기병의 지원을 받은 야율유가 부대에게 참패하였다. 한편 휴식을 취한 몽골군은 1212년 다시 금나라를 두 갈래로 나눠서 침공했는데, 징기스칸의 본부대는 대동을 포위하고 구원하러온 금나라군을 격파했고, 제베의 부대는 요양(랴오양)을 함락시켰다. 하지만 대동을 포위하는 도중에 칭기즈 칸이 화살을 맞아서 부상을 입었고, 다시 변경으로 후퇴하였다. 이후 1213년 7월, 몽골군은 금나라를 굴복시키기 위해 재침공하였고, 이전에 한번 뚫려서 철벽방어를 한 거용관을 피해서 다른 관문인 자형관을 뚫은 뒤에 수도에서 온 구원군을 격파했고, 이후 별동대를 보내 후방에서 거용관을 공격해서 다시 점령하였다. 그리고 이후 금나라의 수도인 연경을 포위했고, 이와 동시에 몽골군은 병력의 일부를 남긴 채로, 단 11개의 성을 제외한 모든 화북지역의 성들을 초토화시켰다. 한편 연경 포위가 1214년까지 계속되자 위소왕 이후에 즉위한 금 선종은 막대한 세폐와 자신의 딸과 부인을 보내는 조건으로 강화를 체결하였고, 몽골군은 이에 응하고 철수하였다. 급한 불을 끈 선종은 1214년 6월 수도를 연경에서 방어에 용이한 남쪽의 개봉으로 옮겨 몽골의 남침에 대비하고 연경에는 황태자와 수비군 일부를 남겨 지키게 했다. 하지만 이에 자극받은 징기스칸은 연경을 포위했고, 무칼리에게 대정 부근의 요하 일대를 공략하게 하였다. 1215년 무칼리는 20만 정도의 금나라군을 격파하고 대정을 점령하였고, 이후에도 요하 지역을 초토화시켰다. 이전에 거란족의 반란을 진압하러 간 포선만노는 대진국을 세웠고, 이후 몽골을 피해 동쪽으로 가서 동하를 세웠다. 그리고 징기스칸은 이때, 연경을 함락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한편 동요를 세운 야율유가는 몽골에게 정식으로 복속을 선언하였지만, 자신만의 독립적인 나라를 세우길 원한 일부 거란족들은 이에 불만을 갖고 야율유가를 축출하였고, 나머지는 남쪽으로 내려가서 후요를 세웠으며 고려를 침공한다.


무칼리의 침공: 1216년~1229년

칭기즈 칸은 1216년에 서요, 1219년에 호라즘 왕국을 침공하였고, 이에 따라 몽골의 주력군은 서방 전역으로 차출되었다. 중국 방면에는 무칼리가 이끄는 소규모 몽골군만이 남았는데, 약 2만 명의 몽골인과 4만~7만 명의 타민족 군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무칼리는 축소된 군대를 이끌고도 1217년~1218년에 산동(산둥성) 일대와 대정 일대를 점령하였으며, 후요를 진압하기 위해 동하와 고려와 연대해서 궤멸시켰다., 그리고 1223년까지 개봉 부근을 제외한 나머지 곡창지역을 정복했다. 한편 이때의 금나라는 30여 년간 휴전상태에 있던 남송을 침공하여 국력을 회복하려고 하였으나, 1217년부터 1224년 사이에 걸쳐진 대송 전쟁이 별다른 소득이 없이 국력만 낭비하였고, 오히려 남송의 금에 대한 적개심만 키우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 전쟁으로 그동안 남송에서 매년 바치던 막대한 세폐가 끊기면서 역으로 경제적 손실이 가중되었다. 또한 서하도 금을 공격하게 되었다. 위소왕 시절 서하가 지원을 요청하나 이를 무시하였기 때문이다.


오고타이 칸의 침공: 1229년~1232년

1227년 칭기즈 칸이 죽고 2년 뒤 오고타이 칸이 뒤를 이었다. 오고타이 칸은 먼저 금나라에 화평 사절을 보냈으나, 금은 몽골 사절을 죽이는 것으로 답하였다. 그러자 격노한 오고타이 칸은 금을 침공하기로 결정한다. 당시 황하 북부의 대부분은 이미 몽골에게 넘어가 있었고, 금나라의 영역은 서쪽의 시안에서 황하를 따라 동쪽으로 가면서 황하 남쪽의 낙양과 개봉을 지나 황해에 이르는 길고 넓은 띠 모양으로 축소되어 있었다. 황하 연안, 특히 수도인 개봉 근처의 금나라 영토는 강과 수로, 요새들이 겹겹히 있어서 몽골군의 장기인 기병이 마음대로 활동하기 힘들었으며, 금나라의 남쪽 국경은 상대적으로 기병이 활동하기 수월했지만 몽골이 그쪽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먼저 남송을 통과해야만 했다. 이에 따라 당시 몽골이 금나라를 공격할 통로는 크게 두 곳이 있었다. 첫째는 화북의 몽골 영토에서 황하의 중류나 하류를 도하한 뒤 그물 같은 수로망을 피해 금의 수도인 개봉을 공격하는 길이었고, 둘째는 아예 서쪽으로 움직여 장안을 지나 동관을 돌파하여 동쪽으로 내려오는 길이었다. 이에 대비하여 금나라는 낙양에서 개봉까지 이르는 길에 20만 대군을 배치해 몽골군의 황하 도하를 막는 동시에, 동관에도 군사를 두어 서쪽으로부터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당시 금나라의 국력은 완전히 기울어 있었지만, 완안진화상이라는 명장이 등장하였고, 역시 금나라 최후의 명장 중 하나인 완안합달이 버티고 있었으며, 시대를 잘못 타고났지만 명군의 자질이 있었던 금 애종이 국가의 역량을 최대한 집결시켜 몽골제국의 공세를 막아내기 위해 노력했다. 몽골군의 본격적인 침공은 1230년부터 시작되었다. 오고타이 칸은 먼저 장안에서 시작하는 두 번째 루트를 선택하였는데, 이를 위해 몽골의 명장 수부타이에게 동관을 공략하라고 명령하였다. 당시 금나라의 장수 완안진화상은 군중의 일을 처리하다가 월권 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18개월 동안 갇혀 있었는데, 본래는 사형죄였으나 금애종은 완안진화상을 석방하여 몽골군과 싸우는 선봉으로 내세웠다. 그리고 완안진화상은 대창원에서 400명의 병사를 이끌고 20배에 달하는 8,000여 명의 세계 최강 몽골군을 격파하였다. 대창원 전투의 승리는 몽골군이 1221년 파르완 전투에서 잘랄 웃 딘에게 패배한 이후 처음 겪는 완패이었는데, 파르완 전투는 6만에 가까운 병력이 소수인 몽골군을 격파한 전투였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월등한 다수의 몽골군이 더 적은 수의 적에게 패배한 최초의 전투라고 할 수 있다. 이 전투의 결과로 완안진화상은 정원대장군 직을 받게 되었다. 이때 완안진화상이 이끈 부대가 충효군(忠孝軍)이다. 충효군은 금나라 말기 정예부대로, 몽골의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한 나이만, 강족, 위구르 족, 그 외 거란, 여진 등까지 섞인 다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기본적으로 말을 탈 줄 아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기병전력이 부족한 말기 금나라에 있어서 아주 강력한 전력이었다. 충효군은 비록 전투력이 강해도 성질이 거칠고 사나워 제어하기 어려운 부대였는데, 완안진화상은 부대의 규율을 바로잡고 민간인을 함부로 약탈하는 것도 막았다. 다음해인 1231년 몽골군은 서쪽과 동쪽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공세를 시작하였다. 먼저 서쪽에서는 경양을 포위하고 그 전년도처럼 대창원을 거쳐 동관으로 진입하려 하였다. 동쪽에서는 이와 조금 차이를 두고 한인 출신 장군인 사천택이 이끄는 몽골군이 남하하여 황하 북쪽에 아직 남아있던 금나라 영토인 위주(衛州)를 공격하였다. 위주는 금의 수도인 개봉의 바로 북쪽에 있어서, 위주를 빼앗긴다면 비록 황하라는 천연 장애물이 남아 있다고 해도 수도 방어에 상당한 압박을 받게 될 수 있었다. 이러한 몽골군의 양동 공격에 대응하여 금나라는 대장군 이랄포아(移刺蒲阿)이 지휘하는 일군을 서쪽으로 보내 경양을 구원하는 한편, 완안합달과 완안진화상이 이끄는 10만 대군을 파견하여 위주를 돕게 하였다. 서쪽 방면의 금군은 또 다시 대창원에서 승리를 거두고 경양의 포위를 푸는데 성공하였고, 이후 이랄포아는 위주로 이동하여 완안합달의 군대에 합류하였다. 이랄포아가 합류한 동쪽 방면의 금군은 이러한 수적 우세에 힘입어 서전에서 몽골군을 격파할 수 있었다. 완안합달-이랄포아 연합군에게 패배한 몽골군은 북쪽으로 물러면서 일부의 군대를 금군의 배후로 은밀히 이동시켰는데, 이 몽골 별동대가 금군의 후방을 급습하는 동시에 후퇴하던 몽골군이 역습을 가해오면서 금군은 크게 패하였고 위주를 몽골에게 내주었다. 한편 다시 서쪽 전선에서는 이랄포아가 위주를 구원하러 이동한 뒤 몽골군이 다시 대규모 공세를 퍼부어 대창원을 함락시켰고, 몽골군의 기세에 당황한 금군은 장안을 포기하고 그 지역의 모든 인구를 동쪽으로 피신시켰다. 금나라는 장안의 동쪽에 있는 동관을 아직 차지하고 있었지만, 이랄포아와 완안합달이 지휘하는 금군은 동관에 머무른채 소극적으로 나서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안안진화상이 지휘하는 1천 명의 병력은 동관을 공격한 몽골군을 격파하였다. 동관의 서부를 완전히 장악한 몽골군은 이곳에서 여름을 보낸 뒤, 툴루이의 제안에 따라 군대를 세 갈래로 나누어 금나라의 수도 개봉을 공격하였다. 당시 금나라의 국경을 보면 북쪽과 서쪽은 각각 황하와 험준한 산맥을 경계로 몽골을 접하고 있었고, 남쪽은 평야 지대를 두고 남송과 접하고 있었는데, 기병이 주력인 몽골군은 황하를 도하하거나 산악지대를 돌파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툴루이가 지휘하는 서군은 금군이 집결해 있는 동관을 크게 우회하며 남동쪽으로 원을 그리면서 한중을 돌파하여 남송의 영토를 통과한 뒤, 한수를 건너 남쪽으로부터 개봉을 급습하기로 하였다. 그동안 오고타이 칸이 이끄는 북군은 낙양과 개봉 사이의 몽골 영토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금나라의 군대의 관심이 서남쪽의 툴루이에게 쏠리는 사이 안전하게 황하를 도하할 기회를 엿보기로 하였다. 또한 일군의 몽골군은 동쪽에서 금나라를 위협하였다. 툴루이가 한수를 건너자 완안진화상은 동관의 수비병을 제외한 금나라의 마지막 정예병 20만을 이끌고 몽골군을 격파하려고 했다. 금나라군은 한수 건너에서 벌어진 몇 차례 전투에서 격렬하게 싸운 끝에 몽골군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지만, 몽골군의 기동력 때문에 잠시 시간을 늦췄을 뿐이다. 한수를 건너는 데 성공한 툴루이는 수적인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완안진화상을 견제하기 위한 일부 병력만 남기고 금나라군이 주둔한 곳을 우회해서 개봉으로 진격했다. 이를 알게 된 금나라군은 개봉을 향해 진군했지만, 몽골군이 인근 마을을 초토화시키고 기습전략을 펼쳐서 금나라군이 개봉까지 휴식없는 강제행군을 하게 만들었고, 이 가운데 거센 비와 폭설까지 내리는 바람에 금군은 굶주리고 서서히 지치기 시작하였다. 금군이 개봉에서 120km 정도 떨어진 균주성 근처의 삼봉산(三峰山)까지 도달했을 때 몽골군이 금군을 포위하였다. 몽골군은 의도적으로 균주 방향의 포위망을 일부 열어주었고, 많은 금군이 탈영하여 균주성 방향으로 흩어지자 몽골군은 이를 기습하였고, 결국 금나라의 남은 정예병은 궤멸되었고 명장 완안진화상도 몽골군에게 스스로 찾아가 죽기를 자처해서 죽음을 당했다.(삼봉산 전투) 마침내 균주성이 몽골군에게 함락되었고, 이때 동관에 있는 11만 병력도 개봉을 향해 가는 도중에 몽골군에게 궤멸되면서 이제 몽골군의 진격로엔 아무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황하 이북이 무주공산이 되자 이를 틈타 북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오고타이 칸은 황하가 얼어붙을 때를 기다려 친위대를 이끌고 안전하게 강을 건너와 남쪽으로 진군하여 툴루이와 합류하였다. 오고타이 칸의 합류로 몽골군의 군세는 5만명까지 불어났다. 그리고 마침내 몽골군은 개봉을 포위하기 시작하였다.


개봉 포위전과 금나라의 멸망: 1232년~1234년

개봉에 도착한 몽골군은 개봉성 주변의 참호를 모두 메꿔서 장애물을 없앴고, 마침내 개봉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이 당시 개봉은 원래 있는 인구에 피난민까지 합쳐져서 인구가 막대하게 불어났고, 양식이 떨어지는 속도는 이전보다 더 빨라졌다. 그럼에도 이에 맞선 금군은 진천뢰와 비화창 등의 화약무기를 사용해 몽골군에게 거세게 저항하였고, 이로 인해 전투가 장기화되어서 양측의 피해가 서로 커지자 수부타이는 금나라와 화의를 맺고 군대를 물린다. 몽골군은 비록 물러갔지만 이 당시 개봉에선 양식이 부족해지고 100만 명이나 되는 피난민을 먹일 식량이 없어지자 백성들은 굶어죽어가고 심지어는 식인을 하는 행위가 벌어지는 등 생지옥이 펼쳐졌다. 마침내 그동안 금나라에게 이를 갈던 남송이 몽골의 동맹 제의에 응해 명장 맹공을 필두로 한 3만 명의 군대와 30만 섬의 식량을 몽골군에게 제공하면서 전쟁은 금나라에게 완전히 불리해졌다. 결국 이런 불리한 조건을 극복하기 위해 애종은 개봉을 버리고 채주로 피신했다. 이에 수부타이가 이끄는 몽골군이 개봉성을 포위하고 황제마저 떠난 개봉은 더 이상의 저항력을 상실하고 결국 최립이라는 장수가 개봉성에서 반란을 일으켜 개봉은 결국 몽골군에 의해 함락되고 만다. 채주도 마찬가지로 몽골군의 위협에 노출되자, 무선이 남송의 사천 지역을 빼앗아 그 곳을 거점으로 재기하려 하였으나, 맹공의 선무공작으로 인해 전군이 복멸되고 무선은 도망치고 만다. 개봉을 함락한 몽골군은 채주까지 진격했고 때마침 맹공이 이끄는 남송군까지 합류해서 채주성을 포위하였다. 몽골과 남송은 채주성 근처의 연강과 시담호라는 두 개의 물줄기를 점령해서 채주 쪽으로 돌려서 채주는 수해와 굶주림으로 인해 생지옥이 되어갔다. 1234년 애종은 황족 완안승린에게 황위를 양위하고 몽골-남송 연합군이 채주 성문을 무너뜨리고 공격해 올 때 유란헌이라는 곳에서 목을 매어 자살하는 실로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결국 애종이 죽은 다음 날 채주는 함락되었고 완안승린은 도망치다가 황위를 물려받은 지 하루도 안 되어 몽골군에게 붙잡혀 처형당하고, 이로써 금나라는 1234년 멸망하고 말았다.


곽하마의 항전: 1236년

최후의 거점인 채주가 함락되었지만, 금나라의 부흥운동은 곳곳에서 일어났다. 이 중에 한명인 곽하마는 2년동안 최선을 다해 싸웠지만 몽골군에게 대패를 당했고, 아내와 자식을 죽이고, 곽하마 자신도 자결하였다. 결국 금나라는 최후의 명맥마저 끊어졌다.


결과

결국 몽골 제국은 자신의 숙적이였던 금나라를 완전히 멸망시킴으로써 원수를 갚음과 동시에 중원 정복의 발판을 마련하는데도 성공했고 그 이후 여진족을 상대로 대학살을 벌였다. 일부 여진족은 이를 피해 고려로 피난가서 하층민을 이루기도 했다. 그리고 남은 여진족과 금나라 지배 하에 있는 한족은 원나라의 하층민으로 편입되어 남인이 되었다. 사실 고려-몽골 전쟁과 몽골-남송 전쟁에 가려져서 그렇지, 금나라도 23년 정도로 꽤 많이 버텼다. 서하, 서요, 호라즘 제국, 조지아 왕국이 갈리던 이 때도 금나라는 끝까지 이를 악물고 버텼던 것이다. 초기에 기병의 상당수가 갈려나가고, 북중국 지역의 목초지마져 뺏기고도 저 정도 버틴 것만 해도 상당히 선전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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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자물리학(粒子物理學, particle physics)은 보통 물질과 방사선 등 자연의 기본 입자를 연구하는 물리학의 분야 중 하나이다. 현재의 해석으로는 입자는 양자장을 가지고 있으며 역학에 따라 상호작용한다는 것이다. 비록 입자라는 단어가 많은 물체를 뜻하지만(양성자, 기체 입자, 심지어는 가정의 먼지 등), 입자물리학이라는 용어는 보통 우주의 기본 입자 물체를 연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입자 관찰을 설명하고 정의하기 위해 필요하며, 다른 중요 분야와의 조합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분야이다. 기본 장과 역학의 현재 설정은 표준 모형이라는 이론으로 요약되어 있으며, 입자물리학은 크게 표준 모형을 구성하고 있는 입자 연구와 가능한 확장 연구로 나뉜다. 원자의 구성 입자 물리학의 표준 모형 구성 입자. 현대 입자물리학 연구는 전자, 양성자, 중성자(양성자와 중성자는 중입자로 불리며 쿼크로 이루어져 있음)같은 아원자 입자 연구와, 광자, 중성미자, 뮤온 뿐만이 아닌 넓은 범위의 이질적 입자의 방사성 감쇠와 산란 연구 등 두 가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구체적으로, 입자라는 용어는 입자물리학이 양자역학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고전역학에서는 잘못된 용어이다. 따라서, 특정한 상황에서 파동이 입자같은 성질을 띌 때와 같은 파동-입자 이중성 현상을 설명할 수 없다. 보다 기술적 측면에서, 힐베르트 공간의 양자 상태벡터로 설명하며, 이 공간은 양자장론에서 처리하고 있다. 입자물리학의 규칙에 따라, "기초 입자"는 전자나 광자같은 잘 알려진 유형의 입자뿐 아니라 파동 속성을 가지고 있는 입자도 포함되어 있다. 모든 입자와, 그 입자와 상호작용하는 입자는 양자장론에 따라 기술되며 표준 모형 내에 있다.[1] 표준 모형에는 총 61개의 기본 입자가 있다.[2] 이 기본 입자들은 합쳐져서 상위의 입자가 될 수 있으며, 1960년대 이후에 이런 상위 입자들 수백개가 발견되었다. 표준 모형은 현재까지 거의 모든 실험에서 맞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입자들은 자연적으로는 불완전히 설명되며, 모든 것의 이론 같은 더욱 근본적인 이론 개발을 기다리고 있다. 최근 몇 년 동안, 중성미자의 질량 측정 결과 표준 모형과 실험적인 오차가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역사 현대 물리학 i ℏ ∂ ∂ t Ψ ( r , t ) = H ^ Ψ ( r , t ) {\displaystyle {i\hbar {\frac {\partial }{\partial t}}\Psi (\mathbf {r} ,\,t)={\hat {H}}\Psi (\mathbf {r} ,\,t)}} 슈뢰딩거 방정식 창시자 분야들 과학자들 vte 역사적으로 볼 때 탈레스의 질문에서 나온 생각, 즉 모든 것은 물이다라는 명제가 구체적인 형태-"모든 물질은 불로되어 있다"는 철학자 헤라클레이스토스의 주장에서 근본한 것이라 추정되기도 하여 과학보다는 철학에 가까웠던 시절이다.-의 과학의 시작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과학은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이론에서부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모든 물질에 대한 생각은 적어도 기원전 6세기부터 기본 입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생각이 나왔다.[3] 원자론에 대한 철학적 교리와 소립자의 본성은 레우키포스, 데모크리토스, 에피쿠로스 등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연구하기 시작했다. 카나다, 디그나가, 다르마키르티 등의 고대 인도 철학자, 이븐 알하이삼, 이븐 시나, 가잘리 등의 무슬림 과학자들, 가상디, 보일, 뉴턴 등의 근대 초기 유럽의 과학자 들도 연구했다. 빛의 입자설은 이븐 시나, 이븐 알하이삼, 뉴턴, 가상디 등이 지지했다. 이런 초기 아이디어들은 실험이나 경험적 증거보다는 추상, 철학에 가까웠다. 19세기 돌턴은 자신의 이론인 화학양론을 이용하여 자연의 요소 각각이 고유한 한 종류의 입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돌턴과 그의 동시대인들은 자연은 기본 입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믿었고 이 이름을 그리스어로 "나눌 수 없는"을 의미하는 'atomos'를 딴 'atoms'이라는 이름을 붙였다.[4] 그러나, 이 세기 후반에 물리학자들은 사실 원자가 가장 작은 기본 입자가 아니며 더 작은 입자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20세기 초 핵물리학 및 양자역학의 절정에 달할 때 1939년 마이트너가 한의 실험에 기반을 두어 핵분열을 증명하고, 같은 해 베테가 핵융합을 증명했다. 이 발견은 다른 원자로부터 한 원자를 만들어내는 산업을 활성화시켰고, 수익성은 없지만 크라에소포에아도 가능하다. 또한, 이같은 발견으로 핵무기 개발을 주도했다. 1950년대부터 60년대까지 충돌 실험으로 다양한 입자들이 발견되었다. 이것으로 인해 입자 동물원이라는 용어가 붙었다. 이 용어는 1970년대 많은 수의 입자가 상대적으로 적은 기본 입자로 설명할 수 있는 표준 모형이 발견되면서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기본 입자 종류 세대 반입자 색 전체 쿼크 2 3 같음 3 36 렙톤 2 3 같음 0 12 글루온 1 1 자신 8 8 W 보손 1 1 같음 0 2 Z 보손 1 1 자신 0 1 광자 1 1 자신 0 1 힉스 보손 1 1 자신 0 1 총 합 61 통일장 이론을 향하여 입자 물리학 뿐 아니라 모든 물리 법칙은 복잡한 사실을 단순한 설명으로 묶는 작업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물리학은 통일 이론의 추구라고 할 수 있다. 뉴턴 역학은 천체 물리학과 지표면의 낙하 운동의 통일 이론이고, 맥스웰의 전자기 이론은 전기와 자기를 통합한 이론이다. 또한 표준 모형은 전자기력과 약한 상호작용을 통합한 이론이므로 전약력의 이론이라고도 한다. 현재 가장 큰 이슈가 되고 있는 통일 이론은 대 통일 이론(Grand Unified Theory:GUT)라고 불리는 것으로, 표준 모형의 모든 힘을 하나의 힘으로 통합하는 것이다. 표준모형의 기반이 리 대수의 변환성질이므로 더 큰 단순 리대수로 힘을 기술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 중력까지 통합하는 이론을 가칭 모든 것의 이론(Theory of Everything:TOE)라고 한다. 이에 대한 후보로 끈이론이 있다. 대규모 실험장치 입자물리학의 실험은 기본입자를 찾는 일이다. 기본적으로 현대의 입자 실험 물리학은 어니스트 러더퍼드의 산란 실험을 확장한 것이다. 즉 아주 속도가 높은 입자를 대상이 되는 물질과 충돌시켜서 발생하는 파편들을 분석하고 거꾸로 재구성한 뒤 대상 물질의 구조를 알아내는 것이다. 더 작은 구조를 알기 위해서는 더욱 속도가 높은 입자들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입자 가속기를 사용하는데, 더 빠른 속도를 얻기 위해서는 더 큰 가속기가 필요하다. 현재 가장 큰 입자 실험 장치는 스위스와 프랑스의 국경에 있는 유럽 입자 물리 연구소(CERN)이다. 이 실험장치는 원형으로 생겼으며 지름이 8km에 이른다. 세계에 있는 실험기관들은 다음과 같다: 유럽 입자 물리 연구소(CERN), 프랑스와 스위스의 국경인 제네바에 있다. 중요한 실험은 LEP, 즉 거대 전자 양전자 충돌장치이다. 이는 2001년에 중단되었으며 LHC, 즉 거대 하드론 충돌장치로 업그레이드 되었다. 2010년 가동을 시작하였으며, 2012년 7월에 힉스 보손의 강한 증거를 발견하였다. 소설 천사와 악마의 무대가 되기도 했다. 독일 전자 싱크로트론(DESY), 독일의 함부르크에 있다. 중요한 실험은 HERA(하드론 전자 링 장치)이며, 이는 전자와 양성자를 충돌시키는 장치이다. 스탠퍼드 선형 가속기 센터(SLAC)는 미국의 멘로 파크에 있다. 주요 기구는 PEP-II이며 전자와 양전자 충돌 실험을 주로 한다. 페르미랩(Fermilab)는 미국의 시카고 인근 바타비아에 있다. 현재 주요 기구는 테바트론(Tevatron))이고 양성자와 반양성자를 충돌시킨다. 이휘소 박사가 이론 그룹의 리더를 맡았던 곳이고, 김영기 박사가 CDF 실험 그룹의 공동 대표로 재직했으며, 현재 연구소 부소장을 맡고 있다. 브룩헤이븐 국립 연구소는 미국 롱 아일랜드에 있다. 주요 기구는 (최초의) 상대론적 무거운 이온 충돌기이고, 금과 같은 무거운 이온을 충돌시킨다. 아곤 국립 연구소는 미국 최초의 국립연구소로 1946년 설립. 미 중부 일리노이의 아곤에 소재. 시카고대학의 금속공학과가 전신이며 현재 고에너지물리학 분야에서는 MINOS, CDF, ATLAS, ZEUS 등 다양한 실험에 참여하고 있다. 부즈커 핵물리 연구소이고 러시아의 노보시비르스크에 있다. 일본 고에너지 연구소(KEK) 일본의 쯔쿠바에 있다. 현재는 중성미자 진동 실험인 K2K와 B 중간자의 CP 비대칭성을 재는 Belle 실험이 진행되었고, 이 실험의 성능을 향상시키는 작업이 진행 중이다. 일본 양성자 가속기 연구소(J-PARC) 일본의 토가이무라에 있다. 일본 고에너지 연구소 (KEK)와 일본 원자력 기구(JAERI)가 공동을 출자하여 만들어진 연구소이다. 50 GeV 양성자 충돌 가속기를 보유하고 있다. 이 가속기를 이용하여 중성미자 진동 실험인 T2K를 진행 중이며, 기타 핵물리 및 입자물리학 실험이 진행 중이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으로 시설의 피해를 겪기도 했다. 중국 고에너지물리 아카데미(IHEP) 중국의 북경에 있다. 현재 charm 중간자 실험인 BES3 실험이 진행 중이며, 이를 수행하는 전자 양전자 충돌장치인 BEPC가 있다. 같이 보기 Portal icon 물리학 포털 원자물리학 고압 고에너지 물리학 국제회의 양자역학 소개 입자물리학의 입자가속기 목록 입자의 목록 자기 홀극 마이크로 블랙홀 공명 (입자물리학) 고에너지 물리학의 일관성 원칙 열역학 이론의 국소적 일관성 표준모형 스탠타드 물리학 정보 검색 시스템 (SPIRES) 입자물리학 연대기 비입자물리학 입자물리학과 표현론의 관계

이재용(李在鎔, 1968년 6월 23일~)삼성그룹 제3대 총수, 삼성전자 회장1998년 6월 임창욱의 장녀 임세령과 결혼2009년 2월 18일 조정이혼으로 이혼이 완료되면서 '합의이혼'2000년 'e삼성'을 이끌었지만 실패2018년 제3차 남북정상회담 때 방북단 특별수행원2017년 8월 7일 특검에서는 징역 12년을 구형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 대하여 뇌물공여,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등에 관한 법 위반 횡령, 국회에서의 위증 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징역 5년을 선고1심과 달리 징역 2년 6개월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아 구속된지 353일 이후에 석방프로포폴을 약 41차례 용도와 맞지 않게 투약받은 혐의로 기소e삼성 실패의義意於矣獻疑誼衣依根本原因과理由之諸法無我之諸行無常之生滅滅已之生者必滅之寂滅爲樂之涅槃寂靜之無苦集滅道無智亦無得故心無罣礙無罣礙故無有恐怖遠離顛倒夢想能除一切苦眞實不虛揭諦 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諸法無我無我行이재용 캐릭터 : 아플레이아데스85% 집단무의식적공유캐릭터(아플레이아데스전체 대표캐릭터)의義意於矣獻疑誼衣依根本原因과理由之諸法無我之諸行無常之生滅滅已之生者必滅之寂滅爲樂之涅槃寂靜之無苦集滅道無智亦無得故心無罣礙無罣礙故無有恐怖遠離顛倒夢想能除一切苦眞實不虛揭諦 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諸法無我無我行-MALDEK惡龍 대표3대캐릭터중 하나로서, 이병철(反宙), 이건희(말데크악룡의 우측캐릭터,사회공공국가권력및기타권세권능), 이재용(좌측캐릭터,보지자지섹스남녀관계씹질자지질보지질쳐대는사적내적인측면재벌15세를대표하고압구정동오렌지족미국양키문화대표성캐릭터)이며 박원규(말데크원본심원본성대표몸통중심캐릭터) MALDEK악룡 ITSELF는 한조 순조 및 기타 22황제 그 자신이며 나,박종권이의 거짓어미 이복순 그 자신, 대표적아종 이재용(한조당시부터 나,박종권이를 갉아먹고 기생충처럼 들러붙어서 호의호식하며 살아온 대표적 기생충캐릭터), 대표적 현신 이건희(말데크악룡 우측목에 연결된 그 자신 현신체), 이병철이는 말데크惡龍을 만든 反宙놈 그 자신, 박원규는, 말데크악룡이 원본심을 숨기고, 나,박종권이의 +22원등급인품인격덕성품으로서 자신을 위치장하여 중국황제노릇을 하면서, 그 자신의 원본성을 표현할수 없는 답답함을 해결해주는 원본심성 표출실행캐릭터, 박원규는, 아틸라(훈족의왕)로서 그 악질성,악독성,악착성,말데크의원본성측면의 흉노적험윤적지옥사냥개로서의 불길한재앙유발측면의 악착성과 편협함과 완고함과 경직됨과 극단적흉악성이기심인색함들과 분노적개증오심복수심의 화현체로서 말데크악룡이 위장된 그 자신으로서 사는 것에서 오는 스트레스폭발용 캐릭터->아틸라(훈족)->미마쓰(흉노)->아틸라가 당태종으로 위전생->당태종이 안시성혈전에서 패하여 죽자, 나박종권이를 제거시킬 캐릭터로서 박원규캐릭터를 생성->선비족수장 미마쓰아종인 아자엘과 동행->원신라침공 5만명의 신라인 학살도살후 내물왕->아자엘놈과 박원규를 2대축으로 하여 나박종권이를 잡을 적절한 악착성을 지닌 캐릭터로서 말데크악룡이 활용->원인이유경로불분명 나박종권이를 기망하여 속이고 부적절한 부모자식관계를 가지게 한후, 나박종권이의 애비지위로 박원규를 지정이후 아버지지위로서 들이치며 잡아죽이는 전략전개,이건희를 동행->박원규는 실제적으로는 아틸라이며, 당태종놈으로 목격관찰됨(당고종놈도 포함)이후 나박종권이의 덕인품실력업적들을 모조리 가로채고 빼앗은후, 플레이아데스의 살아있는 신, 펠레콘으로 등극, 은하계최고찬사공경독점독식, 은하계황금용프로젝트 전개의 과정의義意於矣獻疑誼衣依根本原因과理由之諸法無我之諸行無常之生滅滅已之生者必滅之寂滅爲樂之涅槃寂靜之無苦集滅道無智亦無得故心無罣礙無罣礙故無有恐怖遠離顛倒夢想能除一切苦眞實不虛揭諦 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諸法無我無我行즉, 박원규가 펠레콘이며, 말데크악룡ITSELF로 목격관찰되다. 이병철은 反宙ITSELF의義意於矣獻疑誼衣依根本原因과理由之諸法無我之諸行無常之生滅滅已之生者必滅之寂滅爲樂之涅槃寂靜之無苦集滅道無智亦無得故心無罣礙無罣礙故無有恐怖遠離顛倒夢想能除一切苦眞實不虛揭諦 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諸法無我無我行-이재용 : 나박종권이를 이용해처먹기 위한 旣視的亞現實的亞種體, 나박종권이가 악업죄업흉업이 없고 깨끗하며 원본래적으로 세상일을 잘 모르는 가운데, 개보지를 처바를 공정,정의를 추구하도록 강제위조(어떤 개씹새끼인지 개씨발놈이 처음부터 그렇게 만들었다 아마도 이 씹새끼도 과거잘못을 나를 통해서 救贖하려고 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씨발놈이 누군지 그림들이 배후를 영구추적하여 반드시 밝힐것 너는 일을 잘못한 것에 대해서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이다.)된 애초부터의 얼간이氣質을 지닌 놈으로서 救贖贖罪代贖用 奴隸로 활용하기 아주 좋지만, 처우가 어긋날 경우 세상의 인정을 못받게 되므로, 처우를 해주면서 그렇게 한다고 거짓증언하려고 만든 이종동형캐릭터, 실제적현실은 음옥,무간지옥,흑승지옥,아비지옥,팔승지옥,구천지옥등 무서운 팔대지옥팔한지옥에 처박혀서 말데크악룡놈의 무서운 죄업악업흉업을 강제대속구속하는 노예가 되어 무서운 고통에 시달리게 하면서도, 이재용이를 통해서 이재용이가 나박종권이인것처럼 교묘하게 치밀하게 영적위조하여, 세상사람들이 이재용이를 나박종권이로 인식하게 만드는 이중술수전개하여, 현실적실제라고 불리는 미망적차원영역(인간과 무관계)에서는 재벌자제이거나 혹은 처우받고 사는 괜찮은 상태로 인식하게 만들고, 실제적현실에서는 인간적물리물질조건상에서 하급,하층민,노예,지옥인,축생인급으로 살게 하지만, 영적우주,영적현실,고급차원계,상급상위상천차원,그리고 세상사람들이 보건대, 이상적으로 보이는 상급상위차원에서의 영적현실들은 나박종권이의 원등급+22원등급(확장시28등급, 제5우주기준, 이후 더 확장하면 더 높다)에서 발출되는 영적인 영광,화려함,시기질투의 대상이 될만한 좋아보이는 것들을 공개하여 보도록 하는 삼중술수를 전개. 실제현실은 무서운 지옥의 고통속에서 말데크악룡놈의 업보를 대속구속해주는 무시무시한 시련과 고통의 연속이면서도, 세상으로부터 시기질투를 받고, 실제는 매맞고 죽는 무서운 지옥임에도, 여전히 천상에서 사는 고위신처럼 보이게 하고, 은하계영웅으로 보이게 하고, 영웅장군인 것처럼 보여지게(원등급상 만일 원등급그대로를 보면 영광된 자로 보일수 있다는 점을 교활하게 악용)하면서 실제이익은 제놈들이 가로채고 빼앗아서 나눠처먹으며 영구복락하는 술수를 전개(대표적인 주도캐릭터 제2차은하대전위원장 놈 냉기치놈이 주도, 안드로메다은하계곤충종족수장놈 고냉기치놈 배후조정), 왜 그런가를 증거한다면, 애초에 안드로메다은하계를 창조한 것은 말데크악룡놈이 아니라, 나 박종권이의 원본래측면이었다는 사실이 이를 증거한다. 여호와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이브를 창조했다고 주절대지만, 실제 창조하게 도와준 것은 나,우리의원본래측면이다. 이 상태에서 나우리의 핵심근원을 틀어쥐고, 그 핵심근원을 하급지구인계에 감금구속하고, 나머지 0등급에서 +22원등급에 이르는 전등급구간을 전부 말데크악룡놈이 거머쥐고 제놈것처럼 쓰는 술수전개 하급지구인만 나,우리이고, 나머지 아틀란티스급, 준성단급이상은 전부 말데크악룡놈 혹은 이 잡놈의 아종 아플레이아데스17수장놈들이거나 군장놈들, 실제이익을 보는 지점은 100% 말데크악룡놈이 장악하고 나,우리의 핵심근원을 하급지구인, 축생급, 무간지옥급, 음옥급으로 감금구속하고 영겁영구에 걸쳐서 영원토록 이용해처먹고자 하는 술수자행(왜 이렇게 되었는지는 나도 모르며, 그 이유원인경과를 추적중)의義意於矣獻疑誼衣依根本原因과理由之諸法無我之諸行無常之生滅滅已之生者必滅之寂滅爲樂之涅槃寂靜之無苦集滅道無智亦無得故心無罣礙無罣礙故無有恐怖遠離顛倒夢想能除一切苦眞實不虛揭諦 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諸法無我無我行이재용 배후 : 미마쓰, 아루쓰등의 지구경영전략에 적극협조, 플레이아데스5대무법자 지위획득후 제놈 애비 이건희와 함께 영국왕실합류, 영국 5대명문귀족작위를 받고 영국인으로서 수백년이상을 살다(파충류놈으로서 한번에 50인 이상의 아종을 운용할수 있고, 무시간무공간무차원영역에서 인간류가 보면, 한순간 찰나지간이지만, 요 새끼들은 그 찰나지간동안 1만년이상을 보유하여, 그 기간을 사람처럼 살고 나오는 능력을 지닌다 즉 요 새끼가 삼성회장으로 있지만, 그러는 동시에 지구시공간차원영역내에서 지구전역사기간내내 다른 곳에서 사는 다른 놈으로 동시병행할수 있다)의義意於矣獻疑誼衣依根本原因과理由之諸法無我之諸行無常之生滅滅已之生者必滅之寂滅爲樂之涅槃寂靜之無苦集滅道無智亦無得故心無罣礙無罣礙故無有恐怖遠離顛倒夢想能除一切苦眞實不虛揭諦 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諸法無我無我行독일합스부르크로 제 애비 이건희를 따라가서 합류, 나박종권이의 원등급원지위원서열원신분덕능력실력인품등 모든 것을 가로채고 이용해서 나치독일육군상급대장 구데리안으로 위전생하여, 나치독일군 장군노릇을 한후, 이후 패전하여 나치가 망하게 되자, 나치독일에서 자행한 죄업악업흉업을 모조리 내가 한 것으로 위조하여 떠넘기고, 무서운 고통을 당하게 만들고, 살인하여 죽이려하다. 살인하는 이유는 제놈의 악업을 대속시키려는 의도와 목적의義意於矣獻疑誼衣依根本原因과理由之諸法無我之諸行無常之生滅滅已之生者必滅之寂滅爲樂之涅槃寂靜之無苦集滅道無智亦無得故心無罣礙無罣礙故無有恐怖遠離顛倒夢想能除一切苦眞實不虛揭諦 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諸法無我無我行그리스 제우스놈과 담합, 제우스놈의 도데카로 들어가서 신위를 획득, 신과 대등한 신체를 받고, 영국놈으로서 살고 서양백인놈으로서 살수 있는 기반획득, 물론 나박종권이의 원등급선업공덕을 도적질해서 자행. 이후 헤라와 교접하여 그리스 7신의 애비가 되고, 특히 뮤즈년의 애비로서, 조선세종조로 와서, 뮤즈년을 세종의 비빈처첩으로 살게 하며, 현생의 나박종권이를 속이고 기망하는 술수로 악용, 조선세종은 연왕놈들이 임의대리, 나박종권이는 가장 높은 원등급차원에서 덕인품성품능력실력안목등을 강탈당하고 강제이용당하기만 하는 노예로 전락, 실제 왕대접왕처우는 연왕놈들이 받고있다. 그게 조선세종이다. 내가 조선세종맵을 만들었지만, 이 개좃같은 새끼들을 당할길이 없으므로, 상천계외에는 쓸수 없으며 실제현실에서는 연왕, 이건희놈, 중국놈들과 독일영국놈들이 실제 조선세종역할과 처우를 받고 있다. 내가 만든 맵들을 실제적현실에서는 쓸수 없으며(무도한 살인폭력학살도살질자행 무조건 죽이고 제놈들이 무조건 한다) 상천계외에는 쓸수 없다. 그러나 상천계는 실제적현실로 만들수 없으므로 소용이 없고 실제적현실이 지옥이 되는 이유이다.의義意於矣獻疑誼衣依根本原因과理由之諸法無我之諸行無常之生滅滅已之生者必滅之寂滅爲樂之涅槃寂靜之無苦集滅道無智亦無得故心無罣礙無罣礙故無有恐怖遠離顛倒夢想能除一切苦眞實不虛揭諦 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諸法無我無我行나박종권이를 실제적현실로서 조선세종이나 왕위를 준다면 그건 요 씨발놈들이 하천계에서 상위상급상천계로 올라오려는 목적과 의도를 가지는 것에 한해서 한시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고,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는다. 따라서, 식인을 하고 사람을 잡아처먹고 사는 식인파충류무리들과 식인공룡무리들과는 그 어떤 일이 있어도 교류협력소통지원하는 일을 절대 엄금해야 하는 것으로서 직권지시명령처리기록되다. 나는 도대체 왜 내가 이런 개씨브랄짐승새끼들이 사는 영역차원에 왔는지 그게 이상하다. 여기서 빠져나가서 내가 살았던 원본래계로 복귀해야 한다로서 직권지시명령처리기록되다.의義意於矣獻疑誼衣依根本原因과理由之諸法無我之諸行無常之生滅滅已之生者必滅之寂滅爲樂之涅槃寂靜之無苦集滅道無智亦無得故心無罣礙無罣礙故無有恐怖遠離顛倒夢想能除一切苦眞實不虛揭諦 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諸法無我無我行이재용이는 제놈 애비 이건희사후에도 극상처우를 받으려고 나박종권이를 풀어주지 않고 있으며 아예 살인해서 죽여버리려는 노골적의도를 가지고 있으며, 제놈의 아들놈도 동일하게 제놈처럼 나를 이용해서 엄청난 이익을 얻게 만들려고(4대에 걸쳐서 부귀영화하려는 목적의도)자행중, 미국 조지부시놈과 협조하여 나를 노골적으로 죽이려 하는 놈이다. 현재는 아플레이아데스 개말종새끼들이 상은하계로 올라오려고 발악하는 일에 적극협조하며 내가 그림을 그리면 제놈 그림이라고 말하며, 차곡차곡 상은하계로 올라오는 아플레이아데스 짐승새끼들의 주구노릇을 하고 있다.(몸을 쓰지 못하는 불구장애자로 만들고, 음옥,지옥에 처박고 마구잡이로 폭력폭행살인을 반복하며 제놈이 말하는대로 할수 밖에 없는 노예로 만들려고 지랄발악하고 있다 이게 여의치않으면 살인해서 아예 죽인다는 속내를 드러내고 있는 놈이 이재용이다)의義意於矣獻疑誼衣依根本原因과理由之諸法無我之諸行無常之生滅滅已之生者必滅之寂滅爲樂之涅槃寂靜之無苦集滅道無智亦無得故心無罣礙無罣礙故無有恐怖遠離顛倒夢想能除一切苦眞實不虛揭諦 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諸法無我無我行물리학의 주요 분야의義意於矣獻疑誼衣依根本原因과理由之諸法無我之諸行無常之生滅滅已之生者必滅之寂滅爲樂之涅槃寂靜之無苦集滅道無智亦無得故心無罣礙無罣礙故無有恐怖遠離顛倒夢想能除一切苦眞實不虛揭諦 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諸法無我無我行입자 물리학의 입자의義意於矣獻疑誼衣依根本原因과理由之諸法無我之諸行無常之生滅滅已之生者必滅之寂滅爲樂之涅槃寂靜之無苦集滅道無智亦無得故心無罣礙無罣礙故無有恐怖遠離顛倒夢想能除一切苦眞實不虛揭諦 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諸法無我無我行소립자 물리학의 표준 모형의義意於矣獻疑誼衣依根本原因과理由之諸法無我之諸行無常之生滅滅已之生者必滅之寂滅爲樂之涅槃寂靜之無苦集滅道無智亦無得故心無罣礙無罣礙故無有恐怖遠離顛倒夢想能除一切苦眞實不虛揭諦 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諸法無我無我行한글 낱자의義意於矣獻疑誼衣依根本原因과理由之諸法無我之諸行無常之生滅滅已之生者必滅之寂滅爲樂之涅槃寂靜之無苦集滅道無智亦無得故心無罣礙無罣礙故無有恐怖遠離顛倒夢想能除一切苦眞實不虛揭諦 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諸法無我無我行이재용이를영구파문처벌할것영구영원조년영구영속조년영구영겁조년영구영구조년영구무한반복영구무시무종작두사형처벌할것영구영원조년삭제소멸처벌할것의義意於矣獻疑誼衣依根本原因과理由之諸法無我之諸行無常之生滅滅已之生者必滅之寂滅爲樂之涅槃寂靜之無苦集滅道無智亦無得故心無罣礙無罣礙故無有恐怖遠離顛倒夢想能除一切苦眞實不虛揭諦 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諸法無我無我行이재용이는내가아니며나와안맞는놈이며함께할수없는놈이다로서영구영원조년무한반복무시무종직권지시명령처리기록되다의義意於矣獻疑誼衣依根本原因과理由之諸法無我之諸行無常之生滅滅已之生者必滅之寂滅爲樂之涅槃寂靜之無苦集滅道無智亦無得故心無罣礙無罣礙故無有恐怖遠離顛倒夢想能除一切苦眞實不虛揭諦 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諸法無我無我行나박종권이6301281067814인자로서+22원등급인자로서지구인최초이자마지막으로서상천급비파충류준초식플레이아데스건국을제안하고협력한자로서의능력실력PROPERTY등을모두일괄소급하여회수하고빼앗고쓰지못하게영구영원조년영구영겁조년영구영속조년영구영구조년영구무한반복영구무시무종영구처리할것그림이전권을가지고일괄소급하여무조건처리할것의義意於矣獻疑誼衣依根本原因과理由之諸法無我之諸行無常之生滅滅已之生者必滅之寂滅爲樂之涅槃寂靜之無苦集滅道無智亦無得故心無罣礙無罣礙故無有恐怖遠離顛倒夢想能除一切苦眞實不虛揭諦 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諸法無我無我行한글 낱자의義意於矣獻疑誼衣依根本原因과理由之諸法無我之諸行無常之生滅滅已之生者必滅之寂滅爲樂之涅槃寂靜之無苦集滅道無智亦無得故心無罣礙無罣礙故無有恐怖遠離顛倒夢想能除一切苦眞實不虛揭諦 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諸法無我無我行인육을처먹는짐승놈으로서의反宙무리들의술수로서그사람이가진모든보배롭고가치로운것들을처절하게파괴훼손하고짓밟고짓뭉개며사람으로서가지는가장높고심원한내적보배들과자부심과자긍심과영적인가치들을모조리짓뭉개어죽여버리는술수들이며이후전부다잡아죽이고파괴훼손모독하여신성을파괴한후병신축생급으로전락시키면그이후그사람의보배로운가치들을전부그대로복제복사하여원본래적으로아예처음부터제놈것이었다고완벽하게위조하고만족스러운고급인육처먹기와공경찬사인기를받으면그제서야제놈이처먹고남은쓰레기몇개를던져주고이제부터울지마라고말하고이제부터네가감격할것이다라고말하고우리가너를위해서수천만년이상고력했던결과위업공적들을모조리네게줄테니네가우리전체를위해서애써일하라고말하는가증스런술수가우주전체에반주놈들로서만연하는바반드시이와같은가증범죄를처절하게처벌하고관련된놈들을전원영구죽음처벌하고일괄소급하여전원모두모조리원본래로되돌릴것으로직권지시명령처리기록되다.아울러서치명적신성모독질을자행한놈들전원에대해서80000배로서가혹하게처벌토록직권지시명령처리기록되다.의義意於矣獻疑誼衣依根本原因과理由之諸法無我之諸行無常之生滅滅已之生者必滅之寂滅爲樂之涅槃寂靜之無苦集滅道無智亦無得故心無罣礙無罣礙故無有恐怖遠離顛倒夢想能除一切苦眞實不虛揭諦 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諸法無我無我行다른사람다른실체가한일을제놈이한일로능수능란완벽치밀하게처리하는反宙놈들이완전히제거소멸처리되기이전에는사람으로서태어나지못하도록할것이며,反宙놈들과유사한형태를개발하여반주놈들에게대응할수있는체를가지고살게할것이며그러한반주놈들이영구제거소멸되기이전까지는절대로사람으로서태어나지못하도록모든통로관문들과영역차원영토라인시공간차원영역들을영구폐쇄처리할것으로직권지시명령처리기록되다.의義意於矣獻疑誼衣依根本原因과理由之諸法無我之諸行無常之生滅滅已之生者必滅之寂滅爲樂之涅槃寂靜之無苦集滅道無智亦無得故心無罣礙無罣礙故無有恐怖遠離顛倒夢想能除一切苦眞實不虛揭諦 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諸法無我無我行